출처 : 동아일보 [ 원문 바로가기 ]


[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 <6> 적도의 붉은 선을 찾아보시게

 


뱃사람들은 적도를 지날 때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 이런 의식을 ‘적도제(赤道祭)’라고 부른다. 적도 지대에는 바람이 잘 불지 않는다. 범선이 대세이던 시기에는 바다의 신에게 바람을 일으켜 달라고 비는 제사를 지냈다. 범선은 바람으로 추진력을 얻는데 바람이 없어서 덥고 습한 날씨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적도 지역을 재빠르게 빠져나가고자 선원들은 간절히 소망했을 것이다.
한국해양대는 이런 바다의 전통을 가르치는 취지에서 매년 5월 열리는 대학 축제의 이름을 적도제라고 했다. 그런데 축제에는 ‘괴상한’ 전통이 있었다. 바로 스트리킹.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기존 체제에 반항한다는 취지에서 젊은이들이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달리는 스트리킹 현상이 나타났다. 이 스트리킹을 원양 실습을 나간 선배들이 배워 와 적도제에 접목했다. 날이 어둑해지면 운동장을 메운 남녀 수백 쌍이 둘러서서 캠프파이어를 감상했다. 분위기가 한창 고조됐을 때 한쪽 구석에서 고함소리가 들리면서 나체가 나타난다. 흰 제복을 입은 해양대 학생의 파트너 자격으로 적도제를 보려고 오는 여성이 많았다. 여성들은 나체가 나타나면 손으로 눈을 가린다. 개중에는 호기심에 손가락을 벌린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런 일이 벌어지면 ‘미투’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당시는 호기 어린 낭만이었다.


처음 3등 항해사로 승선했을 때 부식으로 돼지머리가 들어왔다. 다른 선원에게 어디에 쓰냐고 물었더니 적도제에 쓴다고 했다. 바다에서 열리는 적도제는 과연 어떨까 궁금했다. 미국 서부와 중국을 항해하는 우리 배는 적도를 지나지 않아 사실 엄밀한 의미의 적도제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궁금했다. 출항 5일째가 되자 경도 180도선을 지나게 됐다. 지구 동쪽 반구에서 서쪽 반구로 넘어갔다. 선장이 적도제를 지낸다고 했다. 적도를 지날 때 여는 적도제를 경도 180도를 지날 때도 지내는 관행이 해운업계에서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적도제가 아니라 180도제인 것이다. 

적도에 대해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적도를 지나기 하루 전 선장은 “적도(赤道)는 붉은 띠라는 의미다. 우리 배가 적도를 지날 때 바다에 쳐 있는 붉은 띠를 꼭 찾아서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쌍안경으로 바다를 유심히 살펴봤다. “아무것도 없다”고 하자 선장은 웃으면서 “이 친구 순진하긴, 넓은 바다에 붉은 띠를 사람이 만들 수 있나. 해도에서 적도를 확인하면 된다”고 했다. 육지에 지도가 있듯이 바다에도 지도가 있다. 이를 해도(海圖)라고 한다. 해도에는 위도와 경도, 항해와 관련된 각종 정보가 들어 있다. 해도에도 북위 0도인 적도가 표시돼 있다. 이것을 알기 쉽게 붉은색으로 선을 그었다. “재미있다”라고 말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순간 배는 북반구와 적도를 지나 남반구에 들어갔다. 

적도제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기선 시대에는 역할을 잃었다. 그럼에도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선원들이 비는 내용은 바람에서 안전 항해로 바뀌었다. 바다의 안전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니, 배가 물길을 가른다면 적도제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직 선장